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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화 ┫

사진가 임응식 구직(求職)

by 부 들 2012. 8. 10.

 

구직(求職)                                                       

사진가 임응식 (林應植 1912-2001)의 대표작은 한국동란직후의
서울(1953)을 포착한 ‘구직(求職)’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인생과 사회상을 기록하는 매체를 글과 그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국동란 직후의 사회상을 이 사진처럼
설득력 있게 강하게 전달해 준 이미지는 없었다고 여겨진다.  

붓글씨로 ‘구직(求職)’이라는 쓴 글씨를 야전잠바 아랫배에 끈으로 동여 맨 30대 청년의 모습,
그는 한 장의 종이에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걸고 거리에 용감하게 나섰으나
고개를 쳐들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은 벙거지로 눈을 약간 가린 채
서울의 빌딩 한쪽 벽에 풀이 죽어  서 있는 모습은 전쟁후의 서울의 단면을 보여 주는 풍경이다.  

사진평론가 조우석은 ‘한국의사진가론(눈빛)’에서 임응식의 ‘구직’은
“분명히 남루한 옷차림의 거리 구직자를 잡은 사진인데도 리얼리즘을 겨냥하는 사회고발성의
비판적 시선은 배제돼 있다는 점이 눈에 뛴다. 어딘지 살롱풍 사진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고
젊은이의 표정 역시 마치 모델처럼 보인다. 그의 모습은 냉정한 삶의 현장의 치열함이나
궁핍함을 상징하기보다는 생활전선에 엉거주춤 끌려든 룸펜의 어떤 자괴감이 묻어나 있다.”라고 했다. 

임응식의 사진은 현실을 바탕으로 했다. 만드는 사진보다는 사진의 특성은 현실을 떠나서
사진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결과가 “구직”이라는 사진이 탄생하게 된 결과이며
‘구직’은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 주는 리얼리티였으며 
사진기록은 역사를 말하는 힘이라는 것을 나타냈다고 할수 있다. 

시간이 흐른 60년후 한국사회는 “구직”이라는 뼈저린 욕망을 가슴에 붙이고
도시에 서 있었던 청년의 모습은 없지만 전쟁을 치른 혼란기에도 간절하게
취업을 하고 싶어했던 청년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한국경제가 세계 10위권에 들어간다고 하면서도
대학을 나와도 취업하기가 어려운 청년들은마음 같아서는 60년 전 ‘구직’이라고 쓴 글씨를 가슴에
붙이고  종로1가에 서있고 싶은 청년이 많을 것이다.

사진은 누가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엄청난 흥미를 유발하는 심오한 사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응식은 사진학 교수의 선구자요 개척자였다.
서울대학미술대학과 이화여자대학 미술대학에 사진 강의를 처음으로 시작했으며
한국최초로 중앙대학 사진학과를 탄생시키는데 숨은 공로자였다.

특히 1953년 한국사진작협회(회장 임응식)가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현 예총)에
가입하려 했던 어두운 시절, 시인 조지훈(趙芝薰)은
「사진쟁이들과 자리를 같이 할수 있겠는가, 사진 단체가 가입되면
문학 단체는 탈퇴하겠다」라는 독설을 퍼부었지만 꾹 참고
예술인들을 일일이 설득시켜 사진 단체를 관철시킨 인물이었다. 

그의 업적중에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 사진부 책임자 에드워드 스타이겐이 주관한
68개국의 사진가 273명의 사진을 뽑아 만든 유명한 ‘인간가족 전’의 전시회를
스타이켄한테 직접 편지를 해서 1957년 4월3일부터 25일간 사진전시회를 경복궁에서 성사시킨 일이었다. 

 “어떤 예술매체보다도 사진만큼 인간생활의 진실된 기록은 없다.
사진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기술도 되고 예술도 된다”며
항상 사진이야기를 하면서 평생을 한국사진계의 발전을 도모한 사진계의 개척자였다.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는 2012년 임응식회고전을 크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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